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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와 인간의 조화: 발리 전통 가옥 철학의 출발점

인도네시아 발리의 전통 가옥은 단순한 주거 공간을 넘어선 철학적 상징체계로 가득 차 있다. 이는 인도네시아 힌두교에서 파생된 ‘우주론(Cosmology)’을 기반으로 하며, 인간이 거주하는 공간은 곧 자연과 신, 인간 사이의 조화를 구현해야 한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발리 전통 가옥의 공간 구성은 ‘트리 히타 카라나(Tri Hita Karana)’라는 철학에 근거하고 있다. 이는 신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 상호 간의 조화를 뜻하는 개념으로, 공간 배치와 건축양식 전반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발리 사람들은 트리 히타 카라나 철학을 바탕으로 건축물의 상하 구조뿐만 아니라, 방향성까지도 신성한 질서에 따라 배치한다. 발리 사람들은 ‘카자(kaja)’와 ‘켈로드(kelod)’라는 개념을 통해 산 방향(신성함)과 바다 방향(속됨)을 구분한다. 이 방향 개념은 건축물의 위치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며, 가장 신성한 건축물은 산을 향한 방향에, 상대적으로 속된 공간은 바다를 향한 방향에 배치된다. 예를 들어, 가족 사당은 반드시 카자 쪽에 위치하며, 부엌이나 쓰레기 처리 장소는 켈로드 쪽에 위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발리 사람들은 이러한 공간 구성 방식을 통해 자연의 흐름과 우주의 질서를 따르고자 하며, 이를 통해 삶의 안정과 조화를 실현한다고 믿는다.

 

이처럼 발리의 전통 가옥은 단순히 외형적인 아름다움이나 기능적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공간은 곧 신성함의 표현이며, 인간의 삶이 우주의 질서와 함께해야 한다는 신념이 구체적인 건축 양식으로 실현된 것이다. 이러한 철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으며, 발리인의 주거 문화뿐 아니라 축제, 예술, 의례 전반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발리 전통 가옥의 공간 철학

가옥 구성의 규칙성과 신성한 공간의 위계

발리 전통 가옥은 여러 개의 독립된 건축물이 한 울타리 안에 모여 있는 형태로 구성된다. 이를 ‘콤플렉스(compound)’ 구조라 부르며, 각 건물은 고유한 기능을 수행한다. 주거지 내부에는 신을 위한 사당, 조상과 부모를 위한 침실, 식사를 준비하는 부엌, 창고, 손님을 위한 공간 등이 분리되어 존재한다. 이 같은 분리된 건축물의 배치는 철저한 상징체계와 방향성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며, 신성한 공간에서 속된 공간으로의 이동 경로가 시각적으로도 드러나도록 설계된다.

 

예를 들어, 가족 사당은 반드시 동북쪽 방향인 ‘카자-칸간(kaja-kangin)’에 위치하게 된다. 이는 산 방향이자 해가 뜨는 방향으로, 가장 신성한 공간으로 여겨진다. 이어서 조상과 부모를 위한 침실이 그 아래에 배치되며, 손님 접대 공간이나 부엌, 창고는 상대적으로 속된 방향인 ‘켈로드’나 서쪽에 위치한다. 이 같은 공간의 위계는 단순히 사회적 역할의 반영만이 아니라, 우주와 인간, 신과 후손 간의 질서를 건축적으로 재현하는 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발리 가옥의 건물 배치는 고대 인도에서 유래한 ‘아스타 코사라(Asta Kosala)’ 및 ‘아스타 브라타(Asta Brata)’라는 전통적 건축 원리를 따른다. 이는 브라만 계급의 건축 사제들이 축조 시 사용한 지침으로, 가족의 생년월일, 기후, 주변 지형 등을 반영하여 가장 길하고 조화로운 배치를 도출하는 체계적 방법론이다. 따라서 발리 전통 가옥은 표준화된 건축 양식이 아니라, 각 가문과 가족의 특성을 반영한 맞춤형 구조를 갖추고 있다.

 

자연과 함께 숨 쉬는 건축 재료와 구조

발리 전통 가옥에서 사용되는 건축 재료는 대부분 자연에서 얻은 것으로, 기후에 최적화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주된 재료는 대나무, 코코넛 나무, 이끼돌, 야자잎, 진흙 등으로 구성되며, 이들은 환경 친화적일 뿐 아니라 통기성, 단열성, 방수성 면에서도 뛰어난 성능을 발휘한다. 특히 발리는 고온다습한 열대성 기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옥 설계 시 자연 환기와 그늘 확보가 핵심적 요소로 고려된다.

 

지붕은 대개 ‘알랑 알랑(Alang-alang)’이라는 야자 식물로 덮여 있으며, 이 재료는 빗물을 잘 흘려보내고 태양열을 차단하는 효과가 탁월하다. 이러한 지붕 구조는 우기에 강하며, 내구성 또한 높은 편이다. 벽체는 돌이나 진흙 벽돌로 이루어지는데, 돌벽은 낮은 온도를 유지하는 데 유리하고, 진흙은 습기를 조절하는 데 도움이 된다. 바닥은 일반적으로 땅과 직접 맞닿아 있거나, 경우에 따라 대나무로 만든 높임 바닥을 사용하는데, 이는 해충을 방지하고 공기의 흐름을 원활하게 한다.

 

자연과의 공존을 실천하는 방식은 조경에서도 나타난다. 마당에는 성스러운 나무나 정원, 연못이 조성되어 있으며, 이는 가옥의 중심축 역할을 하면서도 자연의 흐름과 인간 활동이 조화를 이루도록 돕는다. 예를 들어, 발리의 전통 정원은 단순한 미관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사계의 신들과 조상을 모시는 신성한 공간이자 명상과 치유의 장소로 기능한다. 이처럼 재료와 구조, 조경은 모두 철저한 공간 철학에 기반하여 선택되고 배치되는 요소들이다.

 

가문의 역사와 계급이 반영된 공간 설계

발리의 전통 가옥은 단지 개인이나 가족 단위의 주거지를 넘어서, 가문의 역사와 사회적 계급, 역할을 반영하는 상징적 공간이다. 전통적으로 발리 사회는 카스트 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가옥의 크기, 장식 수준, 공간의 위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상위 카스트에 속하는 가문일수록 더 정교하고 장식이 풍부한 건축 요소를 갖추며, 제례 공간 또한 더 넓고 세분화되어 있다.

 

특히 사당 공간의 규모와 구조는 가문의 권위와 신성함을 나타내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브라만 계급의 가옥은 제사를 집전할 수 있는 별도의 제단과 제물 준비 공간, 사제 전용 공간 등을 포함하며, 이와 같은 배치는 가문이 수행하는 종교적 역할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반면, 수드라 계급은 상대적으로 소규모의 사당을 갖추며, 제례의 간소화된 형태를 따른다.

 

발리의 전통 가옥은 결혼, 출산, 장례 등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맞춰 구조적으로 변화하며, 이러한 유동성은 가옥이 단순한 거주 공간을 넘어서는 이유가 된다. 예를 들어, 자녀가 결혼하면 별도의 공간을 새로이 증축하거나, 기존의 방을 개조하여 새로운 가족 단위가 함께 생활할 수 있도록 조정한다. 발리 전통 가옥은 고정된 구조가 아니라, 가족 구성원의 변화에 따라 유연하게 변형되는 유기체처럼 작동한다. 따라서 발리 전통 가옥은 ‘살아 있는 공간’으로 기능하며, 가문의 시간성과 정체성을 공간 속에 끊임없이 새겨 넣는다.

 

현대화 속에서도 계승되는 발리의 공간 철학

현대에 들어서면서 발리의 전통 가옥은 일부 서구식 건축양식과 기술의 도입으로 변화되고 있지만, 근본적인 공간 철학은 여전히 계승되고 있다. 현대 발리 주택에서도 ‘트리 히타 카라나’를 기반으로 한 공간 구분이 유지되며, 최소한의 사당 공간과 방향 개념이 반영되어 있다. 또한, 관광산업이 발달함에 따라 전통 건축양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리조트와 호텔이 등장하면서, 발리 건축 철학은 오히려 국제적인 관심을 받게 되었다.

 

특히 ‘지속가능한 건축’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이 높아지면서, 발리의 전통 건축 방식은 자연 친화적이고 환경적 영향을 최소화하는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2020년 이후 여러 국제 건축 포럼에서는 발리 가옥의 자연통풍 시스템, 지역재료 활용 방식, 공동체 기반의 건축 결정 방식 등을 지속가능한 모델로 소개하였다. 이 같은 관심은 지역 주민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어, 전통을 보존하면서도 경제적 자립을 도모하는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편, 발리의 젊은 건축가들은 전통과 현대의 접점을 탐색하는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전통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내부 공간을 모듈화하거나,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기술을 접목하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발리의 건축가들은 이 같은 시도를 통해 단순한 복원이 아닌, 고유한 공간 철학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려는 실천을 이어가고 있다. 결국 발리 전통 가옥의 철학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변함없이 지속되며, 건축을 넘어 삶의 방식 자체를 관통하는 문화적 유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