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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성과 효율을 중시한 공간 재배치

조선 후기 궁궐 건축의 가장 뚜렷한 변화 중 하나는 공간 배치 방식의 실용화다. 조선 전기에는 궁궐 공간이 유교적 위계에 따라 엄격히 구획되었고, 이는 전통적 이상 질서를 반영했다. 반면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실용적 행정 운영을 위한 공간 재배치가 시도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경복궁의 중건 과정에서 드러난다. 흥선대원군이 주도한 경복궁 재건(1865~1867)은 단순 복원이 아닌 기능과 이동 동선을 고려한 재구성이었다. 기존에는 국왕의 정무 공간(근정전 영역)과 생활공간(강녕전, 교태전 등)이 명확히 분리되었으나, 후기에는 두 공간의 물리적 거리를 줄여 국왕의 이동 동선을 최소화했다. 이러한 변화는 재정적 제약과 사회 혼란 속에서 효율을 우선한 결과였다.

 

또한, 기존의 정전(근정전)과 편전(사정전)의 위치 관계도 일부 수정되었는데, 정전과 편전이 지나치게 멀어 왕과 신하 사이의 정무적 소통이 지체되는 단점을 보완하고자 한 것이다. 이렇듯 궁궐의 공간은 단순한 권력의 상징에서 실제 운영의 효율성을 반영하는 기능적 구조로 진화했다. 국왕의 사적인 공간과 공식 공간이 보다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일상과 국정 수행 간의 경계를 줄이려는 시도는, 권위와 상징의 궁궐에서 생활과 정무가 통합되는 공간으로의 전환을 상징한다.

 

내외부의 연결성과 개방성 확대

조선 후기 궁궐에서는 외부 공간과 내부 공간의 경계가 다소 완화되고, 개방적인 건축 흐름이 나타났다. 이는 서양 문물과의 접촉 증가 및 상업과 도시의 발달과도 무관하지 않다. 창덕궁 후원의 활용 방식이 대표적이다. 기존의 후원은 국왕과 왕비, 세자 등 극소수 왕실 인물들의 유희 공간이었으나, 후기에는 문신들의 연회나 외국 사신 접대 등 다양한 목적에 활용되면서 공간의 개방성이 확장되었다.

 

더불어, 창경궁의 경우 궁 내부에 서양식 온실인 ‘대온실(大溫室, 현재의 창경원 온실)’이 설치되었다. 이는 1909년 대한제국 시기 설치된 것으로, 내부 구조는 철재와 유리로 구성되어 당시 최신 기술이 반영되었다. 이는 단순한 장식적 시도가 아니라, 궁궐 내 생활에 서양 문물을 점차 흡수하고 반영하려는 실험적 행보였다. 궁궐이라는 보수적 공간에 유리창, 온실, 수로 등의 이질적 요소를 받아들인 것은 공간 구성의 폐쇄성을 넘어서려는 상징적인 변화였다.

 

또한 후기에 새롭게 조성된 덕수궁은 서울 도심에 위치하면서 도로, 관청, 민가와 가까워 내외부의 경계가 상대적으로 유연하였다. 이로 인해 덕수궁은 조선 왕조가 서구 제국과 마주하게 되는 ‘외교 공간’으로 기능하기도 했고, 일제 강점기 이후 일반 시민에게 개방되며 궁궐 공간의 공공성과도 연관되었다.

 

조선 후기 궁궐의 건축적 혁신 5가지

이중 지붕 구조와 서까래 장식의 발전

조선 후기 궁궐 건축에서는 지붕 구조와 서까래 장식에 새로운 미학적 시도가 나타난다. 대표적인 요소 중 하나는 ‘이중 지붕 구조’의 발전이다. 이는 건축물의 실내 단열 효과를 높이는 동시에 외관의 중후함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주로 정전(근정전), 편전(사정전), 또는 주요 문루 등에 활용되었다. 이중 지붕은 상부에 얹힌 겉지붕과 실제 내부 공간을 덮는 속지붕으로 구성되는데, 외부에서는 하나의 거대한 지붕처럼 보이지만 내부 공간에는 층고와 공기 순환을 확보할 수 있어 기능적 측면에서도 유리했다.

 

특히 경복궁 근정전의 경우, 다포양식의 극치를 보여주는 건축으로 평가받는다. ‘다포’는 기둥 상부에 여러 겹의 공포(지붕을 지탱하는 받침 장치)를 쌓아 구조적 안정성과 장식을 동시에 구현한 구조인데, 조선 후기에는 그 형태와 배열이 더욱 정교하고 화려해졌다. 이는 장식미뿐만 아니라, 목재의 하중 분산과 기후 적응이라는 실용적 목적도 함께 담고 있었다.

 

서까래 끝에 붙는 화려한 장식인 첨차(첨와)도 이 시기 더욱 다양화되었다. 첨차에는 박쥐, 학, 연꽃 등의 상징물이 조각되었으며, 이는 단지 미적인 장식을 넘어 왕실의 번영, 장수, 청렴 등의 덕목을 상징하였다. 이러한 조각은 목재 구조물을 단조롭지 않게 만들었고, 동시에 정치적·종교적 의미도 부여하였다.

 

조경과 건축의 일체화된 미학

조선 후기 궁궐 건축에서는 조경과 건축의 경계를 허물고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꾀하는 시도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창덕궁 후원이다. 이 공간은 단순한 정원이 아니라, 건물, 연못, 정자, 수로, 숲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복합 문화 공간이었다. 창덕궁 후원은 산지의 지형을 그대로 살린 비정형 구조로 조성되어 있으며, 이러한 자연 지형을 건축에 끌어들여 자연에 순응하는 궁궐 조경을 구현했다.

 

후원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부용정, 주합루, 애련정 등은 자연을 배경으로 하여 건축물이 자연 속으로 스며들게 설계되었다. 연못 주변의 곡선형 수로와 조형석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수리학적으로 물 흐름을 유도하는 역할도 하였다. 이처럼 건축과 조경이 분리되지 않고 상호 유기적으로 구성된 궁궐 공간은 조선 후기 미의식의 정수를 보여준다.

 

또한, 창덕궁 후원의 정자들은 풍류와 학문, 사색의 공간으로 활용되었으며, 이곳에서 시문을 짓거나 천문을 관측하는 등 지식인의 활동이 이루어졌다. 이는 궁궐을 단지 권력의 상징으로 보지 않고, 문화와 교양이 공존하는 장소로 인식했음을 보여주는 단서다. 이렇듯 조경과 건축의 일체화는 단순한 심미적 차원을 넘어 궁궐의 기능적 다양성과 철학적 깊이를 더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건축 재료의 다양화와 과학적 응용

조선 후기에는 건축 자재의 사용 방식에도 변화가 나타난다. 기존의 목재 중심 구조에서 벗어나 다양한 재료들이 실험적으로 도입되었다. 특히 일제 강점기 이전 대한제국 시기에는 철재와 유리 같은 서양식 재료가 궁궐 건축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덕수궁 석조전이 대표적이다. 석조전은 1910년 이전 완공된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로, 내부는 철근 콘크리트와 석재를 활용한 근대적 구조를 가진다. 이는 단지 외래 양식의 수용이 아니라, 전통 궁궐 건축과 새로운 기술이 병존했던 전환기의 건축 실험이라 볼 수 있다.

 

전통 재료의 활용 방식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기와의 제작 방식이 보다 정교해졌고, 유약을 입힌 청기와나 흑기와가 등장하면서 방수 및 단열 성능이 개선되었다. 단청에서도 천연 안료 외에 일부 광물성 안료가 사용되며 색상의 지속력을 높였다. 이러한 재료 혁신은 단지 시각적 화려함을 위한 것이 아니라, 기후 대응력과 유지 보수 측면에서의 과학적 접근이 강화된 결과였다.

 

또한, 궁궐 내 급수 시설, 배수로, 연못의 수리 체계 등에서도 수공학적 원리가 반영되었는데, 창덕궁 옥류천 주변의 수로 설계는 자연 경사와 수압을 고려해 물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도록 만들어졌다. 이렇듯 조선 후기 궁궐 건축은 단지 형태나 장식의 화려함을 넘어, 과학적 원리와 기술적 진보를 점진적으로 수용해 간 고유의 진화 과정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