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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간 유적지의 역사적 배경과 벽화의 가치

미얀마 중부의 바간(Bagan)은 9세기부터 13세기까지 번성했던 고대 왕국의 수도로, 수천 개의 불탑과 사원, 벽화 유적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지역이다. 유네스코는 2019년 바간을 세계유산으로 지정하면서, 바간 지역의 건축적·종교적 가치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의 생활상과 문화적 신념이 녹아 있는 벽화들의 중요성도 함께 강조하였다.

 

바간의 벽화는 약 2,000여 곳의 사원 및 파고다 내부에서 발견되며, 주로 11세기부터 13세기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벽화는 단순한 장식의 수준을 넘어서 종교적 교리를 전달하는 도구이자, 사원 건축 설계의 상징적 지침서 역할을 하였다.

 

당시 미얀마는 테라바다 불교 중심의 국가였고, 바간은 그 신앙의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벽화에는 부처의 생애를 다룬 자타카 이야기부터 왕실의 시주 장면, 일반 민중의 일상적 삶까지 폭넓은 주제가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중요한 점은 이들 벽화가 단순한 종교화나 역사화가 아니라, 사찰 건축의 구조적 원리와 상징적 의미를 시각적으로 암시하는 ‘건축 코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벽화 속 공간 배치는 실제 사원 구조의 축소판처럼 그려졌으며, 성역의 중심으로 갈수록 점점 더 신성한 인물과 장면이 등장하는 구성 방식은 사찰 내부의 공간 구성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바간의 벽화는 그 자체로 건축학적 해석이 필요한 귀중한 자료이자, 고대 사회의 사유 방식을 보여주는 시각적 문서라 할 수 있다.

 

미얀마 바간 사원의 벽화 속에 담긴 의미와 역사적 맥락

벽화 속 기하학과 축선의 상징 – 공간 배치의 암호

바간 사원의 벽화에는 건축 설계의 핵심 원리가 기하학적 상징으로 표현되어 있다. 예를 들어, 다수의 벽화에서는 불탑이나 사원의 단면도가 만다라(Mandala) 형식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세계 중심을 향해 신성함이 집약된다는 불교의 우주관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사원의 평면이 사각 또는 원형으로 표현되는 것도 이와 같은 철학적 기반에 따른 것이다. 만다라는 중심의 ‘붓다’를 둘러싼 동심원적 배치를 기본으로 하며, 벽화에서는 실제 사원의 내부 구조와 대응되도록 좌우 대칭과 방위 개념이 정교하게 표현된다. 이러한 구조는 단순히 장식적 요소가 아니라, 실제 건축 설계 시 반영된 사상적 기반이기도 하다.

 

특히 축선(軸線)의 시각적 표현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예를 들어, 바간의 아난다 사원(Ananda Temple) 내부 벽화에는 부처의 생애가 동서남북 네 방향 벽에 맞춰 그려져 있다. 이러한 구성은 사찰의 중심에서 사방으로 펼쳐지는 ‘진리의 전파’를 시각화한 것이다. 이는 고대 인도 건축이론인 바스토샤스트라(Vāstu Śāstra)의 공간 개념과도 유사한 구조를 공유하고 있다.

 

바간의 건축가들은 공간 배치를 물리적 설계가 아닌 철학적 전제로 접근했으며, 각 방향은 특정한 다르마(Dharma)의 개념과 결합되어 신성한 체계를 형성하였다. 벽화는 이와 같은 공간 철학을 시각화하여 전달하는 장치였으며, 신도들은 벽화를 통해 공간의 중심성과 방향성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결국 이러한 구성은 건축적 체계와 종교적 상징이 결합된 고차원적 시각 코드로, 사원의 신성성과 의례적 동선을 자연스럽게 유도하였다.

 

벽화 속 등장인물 배치와 위계 구조 – 건축의 사회 질서 반영

바간의 벽화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그 배치는 매우 엄격한 위계 질서를 반영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구성상의 선택이 아니라, 건축물 내부 공간에 구현된 사회적·종교적 위계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예를 들어, 중심에 위치한 부처는 항상 가장 높은 위치나 사원의 중심부에 그려지고, 그 주변에는 보살, 아라한, 고승, 왕족 등이 명확한 질서에 따라 배열된다. 이러한 수직적 계층 구조는 실제 사원의 공간 배치에도 반영되며, 가장 내밀한 공간에 불상이 위치하고, 외곽으로 갈수록 덜 신성한 요소들이 배치된다. 이처럼 벽화는 사원의 설계 논리를 시각적으로 요약한 일종의 도면이자, 불교적 세계관을 시각적으로 드러낸 도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벽화에는 왕이 사원을 시주하거나 불사를 지원하는 장면, 고승이 일반 대중에게 법문을 전하는 장면, 신도들이 합장을 하며 예배하는 장면 등이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구성은 단순히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건축물 내부 공간의 사용 목적과 그 안에서 수행되는 사회적 행위의 질서를 시각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장치였다.

 

즉, 벽화는 단순히 예술이 아닌 공간의 이용 방식을 규정짓는 역할을 했다. 학자들은 이러한 구성이 마치 건축 도면처럼 정교하다고 평가하며, 이를 통해 당시 불교 사회의 권력 구조, 계급 질서, 의례 체계가 어떻게 사원 공간을 통해 구현되었는지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한다. 벽화는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신성과 권위, 일상과 경건함을 구분했는지를 알려주는 귀중한 해석 자료로서, 단순한 장식이 아닌 공간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적 요소로 기능하였다.

 

색채와 상징 코드 – 공간 기능의 시각적 구분

바간 벽화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색채 사용을 통한 공간 구분과 상징 표현이다. 이들 벽화는 대부분 천연 안료로 제작되었으며, 적갈색, 금색, 청색, 흑색, 백색 등이 주요 색으로 사용되었다. 각각의 색은 단순히 미적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특정 공간의 기능과 신성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예를 들어, 붉은색 배경은 신성한 공간 혹은 고귀한 인물의 존재를 의미하며, 청색은 명상과 고요함을 상징하고, 금색은 깨달음과 불성, 곧 궁극적 진리를 나타낸다. 이러한 색채는 사원의 중심에서 외곽으로 나아갈수록 점차 변화하며, 이는 공간의 위계를 색을 통해 시각적으로 분명히 하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벽화에서의 색채 코드는 건축 공간의 기능성과 감정적 경계를 명확히 구분짓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예를 들어, 명상 공간에는 청색과 흑청색이 주로 사용되어 심리적 안정감을 유도하고, 예불 공간에는 금색과 붉은색이 주로 활용되어 경건한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이는 단순히 아름다움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신도들이 공간의 성격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그에 맞는 태도를 취할 수 있도록 돕는 장치였기에 바간의 벽화는 그 자체로 하나의 시각적 매뉴얼이었으며, 색채는 그 매뉴얼을 읽는 데 필요한 열쇠 역할을 하였다.

 

보존과 해석 – 미래 세대를 위한 문화유산의 가치

바간의 벽화는 수세기에 걸쳐 풍화와 지진, 그리고 인간에 의한 훼손으로 점차 손상되고 있지만, 그 안에 담긴 건축적 코드는 여전히 현대 건축학과 종교미학에서 중요한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미얀마 정부는 1990년대부터 유네스코와 협력하여 벽화 보존을 위한 다양한 조치를 시행하고 있으며, 일본 도쿄예술대학과 미얀마 문화재보존센터는 고해상도 스캐닝을 통해 수백 점의 벽화를 디지털로 복원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한다. 이들은 벽화의 색채, 구조, 도상학적 특성을 3D 모델링과 함께 기록하여 후대에 전승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벽화를 해석하는 학문적 시도는 단지 예술사에 국한되지 않는다. 현대 건축가들 역시 바간 벽화 속 공간 개념과 상징 구조에서 영감을 받아 명상 공간, 치유 건축, 종교 시설의 설계에 이를 적용하고 있다. 이는 과거의 건축적 지혜가 현대적 문제 해결에 기여하는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벽화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사원의 구조와 사회 질서를 설명하는 시각적 설계도였으며,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공간 사유의 모델로 기능하고 있다. 따라서 이 유산을 보존하는 일은 단지 문화재를 지키는 것을 넘어, 인간의 공간 인식과 신성 개념, 그리고 예술과 건축의 통합적 사고를 계승하는 중요한 행위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