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게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오래된 골목길을 걷는 것은 일종의 반대 방향으로 걷는 일처럼 느껴진다. 무심코 들어선 오래된 동네의 골목은 내게 삶의 속도, 시선, 방향에 대해 조용히 일러주었다. 공간이 건네는 사색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본다.
골목의 시작, 뜻하지 않게 들어선 방향
하루는 우연히 목적지와는 다른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지도를 보며 걷다가 무심코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는데, 그곳은 평소에 지나치던 동네의 오래된 골목길이었다. 대단히 특별한 풍경은 아니었다. 낡은 담벼락, 오래된 간판, 가끔 귤 껍질이 마른 채 떨어져 있는 인도.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골목에 발을 딛는 순간, 마음이 아주 천천히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주변은 고요했고, 아스팔트 대신 오래된 시멘트 바닥은 발바닥에 감각을 전달해주었다. 나는 그 길의 끝이 어딘지도 모른 채,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방향을 잘못 든 것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안내 받은 느낌이었다.
오래된 골목이 품고 있는 시간의 층
오래된 골목은 단순히 낡고 조용한 길이 아니었다. 그곳에는 시간의 층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벽돌 사이사이에 끼인 먼지, 길가에 놓인 오래된 화분, 우체통 위에 놓인 이름 모를 전단지 하나까지 모두가 이 골목의 시간을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그 위를 조심스럽게 지나가며, 이 골목이 오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기억하고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어떤 사람은 출근길에, 어떤 사람은 퇴근길에, 또 어떤 사람은 이 골목을 마지막으로 지나치고 어디론가 떠났을 수도 있다. 오래된 공간은 늘 그런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시간이 쌓인 장소에는 설명되지 않는 감정이 있고, 그 감정이 조용히 걷는 이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나를 바라보게 만드는 고요한 시선
도시의 중심은 언제나 시끄럽다. 사람들은 목적을 향해 걷고, 화면을 들여다보며, 소음을 배경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오래된 골목은 다르다. 그 안에서는 내가 조용히 나를 바라보게 된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핸드폰을 꺼내지 않은 채로 길을 걸었다. 누구에게 연락을 하지도, 음악을 틀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걸었다. 벽에 비친 내 그림자를 보면서, 그 길을 걷는 지금의 내가 어떤 사람인지 곱씹었다. 무언가를 해야만 존재 의미가 있다고 믿어온 삶에서 잠시 멈춰, '존재만으로 충분하다'는 감각을 느끼게 되었다. 골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분명히 어떤 말을 들었다. ‘괜찮아, 너는 잘 가고 있어’라고.
익숙함 속의 낯섦이 주는 따뜻한 자극
그 골목의 풍경은 어쩌면 아주 평범하고 익숙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작은 세탁소, 문을 반쯤 열어놓은 철물점, 옛 간판 그대로인 분식집. 그러나 그 익숙함이 오히려 나에게는 낯설게 다가왔다. 우리는 너무 세련되고, 너무 깨끗한 것에만 익숙해져 있었던 건 아닐까. 반듯하게 정리된 공간 속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결들이 그 골목에는 있었다. 나는 그 결을 따라 걷는 동안, 오히려 마음이 느슨해졌다. 무엇 하나 흠 없는 공간보다, 시간이 스며든 불완전한 풍경이 훨씬 더 진실해 보였다. 사람도 그렇다. 다듬어지지 않은 말투, 정돈되지 않은 하루, 그런 삶이 오히려 더 사람답다고 느껴졌다.
길은 내가 가는 곳이 아니라, 나를 이끄는 곳
우리는 길을 선택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날 골목에서 나는 처음으로 '길이 나를 선택하는구나'라는 감각을 느꼈다. 방향을 정해 걷는다고 해도, 때로는 발길이 이끄는 대로 가야만 만날 수 있는 풍경이 있다. 그 길을 걷지 않았다면 나는 그날의 감정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계획하지 않았던 방향, 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닌 '길이 나를 초대한 순간'. 그것이 삶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인생의 갈래길에서 때로는 직선이 아닌 우회를 선택해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골목은 그렇게 삶의 방향을 조용히 되묻는다. 너는 정말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가고 있느냐고.
삶의 속도는 골목길이 알려준다
골목을 빠르게 걷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 역시 무의식중에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빠르게 걸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천천히 걷기 시작하자 하나둘 눈에 들어왔다. 창문에 걸린 작은 풍경, 문 앞에 놓인 신발 한 켤레, 담장에 기대어 앉은 고양이 한 마리. 세상은 분명 같은 공간이지만, 속도를 달리하면 전혀 다르게 보인다. 골목은 그것을 알려주었다. 삶의 속도를 조절해야 삶의 결을 느낄 수 있다는 것. 그렇게 나는 빠른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고, 지금 이 방향이 정말 나에게 맞는지를 천천히 돌아볼 수 있었다.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가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골목길은 조용히 가르쳐주었다.
돌아가는 길에서 비로소 만난 방향
그 골목길의 끝은 다시 큰길로 이어졌다. 익숙한 버스 정류장이 보였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졌다. 나는 다시 도시의 소음 속으로 들어왔지만, 마음은 조금 전 그 조용한 골목에 여전히 남아 있는 듯했다. 길을 잘못 든 줄 알았던 선택은 내 삶의 방향을 되묻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때로는 돌아가는 길이 삶의 본래 속도와 방향을 되찾게 해준다. 빠르게 가는 것보다 정확히 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 그리고 그 ‘정확함’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방향이라는 것을, 오래된 골목길이 조용히 일러주었다.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고민할 때, 가장 먼저 필요한 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길이 없다고 느껴질 땐, 오래된 골목길처럼 조용한 공간에서 다시 시작해보면 된다. 길은 언제나, 조용한 곳에서 먼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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