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공간과 삶: 우리가 사는 방식에 대하여

벽과 대화하다: 집이 말을 거는 순간들

가만히 벽을 바라보던 어느 날, 나는 그저 배경인 줄 알았던 공간에서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감지했다. 집은 말을 걸었다. 과거의 온도, 감정의 흔적, 시간이 쌓인 표면 위에서 조용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벽과의 대화는 내 삶의 리듬을 다르게 만들었다.

 

조용한 순간, 벽이 말을 걸었다

 

어느 오후였다. 집 안이 유독 조용하게 느껴지던 날, 나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거실의 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책도 폰도 들지 않은 채, 그저 고요 속에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 벽이 나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물론 실제로 소리를 들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벽면을 따라 흐르는 작은 금이나 햇살이 만든 음영, 그 속에 담긴 세월의 결이 나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우리가 흔히 공간을 배경이라고 여기지만, 그 배경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를 그날 처음 깨달았다. 말이 없는 공간에서 나는 말보다 선명한 감정을 읽고 있었다.

 

벽과 대화하다: 집이 말을 거는 순간들

 

벽에는 기억이 붙는다

 

이 집에 처음 들어왔을 때 벽은 새하얬다. 도배가 막 끝났고, 벽지는 팽팽하고 깨끗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책상이 닿았던 부분에는 살짝 벽지가 눌려 있고, 화분을 두었던 자리엔 자국이 남아 있다. 아이가 어렸을 때 낙서한 흔적도 있고, 무언가를 붙였다가 떼어낸 테이프 자국도 그대로다. 처음엔 지우고 싶었다. 집은 깨끗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것들이기록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벽은 기억의 표면이고, 함께 살아온 날들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그 기억은 때로 눈에 거슬리지만, 없어지면 아쉬운 것들이기도 하다. 벽을 보면서 지난 시간을 되새기고, 사소한 순간들조차도 내 삶의 일부였음을 실감하게 된다.

 

빛의 그림자가 말을 시작할 때

 

하루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늦은 오후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거실 창을 통해 길게 늘어진 빛이 벽에 닿는다. 그 빛은 늘 같은 모양이 아니다. 날씨에 따라, 계절에 따라, 가구의 위치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진다. 빛이 벽을 타고 흐르며 그리는 그림자를 보고 있으면, 마치 자연이 벽을 캔버스 삼아 그림을 그리는 것 같다. 그 장면은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에 말을 걸어온다. 하루가 이렇게 흘렀고, 오늘도 무사히 지나가고 있다는 감각. 조용히 앉아 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일종의 명상이 되고, 내 감정이 정리된다. 빛은 벽 위에서 사유의 시간을 열어준다. 그건 벽이 단지 벽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벽은 나의 상태를 반사한다

 

재미있게도, 같은 벽을 바라보는데도 기분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마음이 무거운 날엔 벽의 어두운 그림자만 눈에 들어오고, 기분이 좋은 날엔 같은 벽도 환하게 느껴진다. 이것은 벽이 내 상태를 반사하는 거울 같은 존재라는 걸 의미한다. 나는 벽을 통해 나를 본다. 차분하지 못한 날일수록 시선은 더 바쁘게 벽을 훑고, 감정이 혼란스러운 날엔 어떤 패턴도 질서 있게 느껴지지 않는다. 반면 마음이 고요할 때 벽은 가장 온전하게 다가온다. 그저 거기 있어주는 존재. 침묵 속에 나를 받아주는 공간. 집 안에서 벽은 가구보다도 더 오랫동안 나와 함께하는 존재다. 그와의 관계가 안정될수록 나는 내 삶에도 더 많은 평화를 느낀다.

 

벽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 벽과 관계 맺기

 

예전엔 벽을 장식하는 걸 좋아했다. 액자를 걸고, 캘리그래피 문구를 붙이고, 트렌디한 색상으로 포인트 벽지를 시도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보다 벽과관계 맺기에 더 관심이 생겼다. 벽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 벽이 어떤 존재로 내 삶에 녹아드는지가 중요해졌다. 흰 벽 하나가 주는 여백이 때론 무엇보다 따뜻하고 깊다. 그 여백은 내가 어떤 상태인지, 내가 무엇을 담고 있는지를 투영하는 공간이다. 그래서 이제는 벽을 함부로 바꾸지 않는다. 어떤 흔적이 남아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편이 더 나에게 맞다고 느낀다. 벽을 꾸미는 게 아니라 벽을 이해하는 것이, 어쩌면 진짜 집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집이 말을 건다는 감각

 

어느 날 밤, 혼자 소파에 앉아 있었을 때였다. 조명이 꺼진 어둠 속에서, 벽에 걸린 작은 액자 하나가 내 눈에 들어왔다. 특별한 건 없었다. 오래 전에 걸어둔 풍경 사진.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그 액자가 너무 따뜻하게 느껴졌다. 벽과 액자, 그리고 그 위로 비친 희미한 빛이 하나의 장면처럼 느껴졌고, 나는 설명할 수 없는 위로를 받았다. 말이 없는데도 무언가를 들은 느낌. 나는 그날 처음으로집이 말을 건다는 표현이 단지 은유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집은 늘 나와 함께 있었고, 나는 그 메시지를 미처 듣지 못했던 것이다. 공간은 그렇게 아주 조용하게, 그러나 분명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다.

 

벽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

 

이제 나는 가끔 벽에 말을 건다.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별일은 없었는지. 물론 벽은 대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나는 내가 무너지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는 걸 확인하게 된다. 벽은 그대로지만, 나는 자라나고 있다. 이 조용한 동행은 그 어떤 위로보다도 깊고 확실하다. 벽과 대화한다는 건 단순한 독백이 아니라, 공간과 나 사이의 감정적 교감이다. 우리는 집을 산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집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삶 속에서 벽이 말을 걸어오는 순간, 비로소 나는 이 공간에살고 있다는 실감을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