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탄 전통 가옥 ‘종’의 건축 철학

종(Dzong)의 정의와 건축적 기원

부탄의 전통 가옥 중 가장 독특하고 상징적인 구조물은 단연 ‘종(Dzong)’이라 할 수 있다. 종은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닌 행정, 군사, 종교 기능이 융합된 복합 건축물로, 17세기 중엽 건축가 및 종교지도자였던 샵드룽 응왕 남걀(Shabdrung Ngawang Namgyal)이 처음 체계화했다. 이 구조물은 티베트 불교의 전통과 부탄 고유의 자연환경에 맞춰 설계되었으며, 산악지형 위에 요새처럼 세워져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공동체를 보호하는 동시에 수행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특히 종은 외형에서부터 독특함을 자아낸다. 흰 벽, 나무 창틀, 금색 지붕으로 이루어진 이 구조물은 자연과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지니며, 주변 산세를 거스르지 않고 오히려 끌어안는 형태로 배치된다. 건물은 대부분 강 근처의 높은 언덕에 세워져 있으며, 정면에서 보면 마치 산과 하나가 된 듯한 인상을 준다.

 

이는 단지 시각적 조화에 그치지 않고, 자연을 신성한 존재로 보는 불교적 세계관의 반영이다. 이와 같은 철학은 부탄 문화유산청(Department of Culture, Bhutan)이 발간한 『Traditional Architecture in Bhutan』에서도 상세히 소개되고 있다.

 

종교와 권력이 융합된 공간 구조

종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은 그 구조 속에 종교성과 행정 권력이 자연스럽게 융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종은 내부적으로는 크게 두 개의 주요 공간으로 나뉜다. 하나는 수도승들이 수행하고 예불을 드리는 종교 공간(츠첸, tshen-chhen), 다른 하나는 지방 행정과 사법 기능을 수행하는 민정 공간(드라캉, dratshang)이다. 이처럼 한 건축물 안에 영적인 공간과 세속적인 권력이 함께 공존하는 구조는 부탄만의 독특한 정치-종교적 체계를 반영한다.

 

이 구조는 단순한 공간 배치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부탄에서 국왕은 정치적 지도자이면서 동시에 불교 수호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중적 역할은 종의 공간 구성에서도 나타난다. 미국 하버드대 건축학 교수 프레드릭 존스턴(Frederick Johnston)은 『The Architecture of Bhutan: Unity in Diversity』에서, 종의 공간이 “정치적 권위와 종교적 엄숙함이 대립하지 않고 서로를 보완하며 유지되는 아시아 유일의 모델”이라 언급했다.

 

또한 종의 중심에는 ‘우체(utse)’라고 불리는 중앙 탑 구조가 있어, 영적 중심이자 방어의 핵심 역할을 한다. 이는 티베트의 종교 건축에서 영향을 받은 요소로, 우주의 중심을 상징하기도 한다.

 

전통 기술과 지역 재료의 활용

종은 건축 기법에서도 부탄 고유의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현대적인 도구나 못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나무 못과 흙, 돌, 나무를 활용한 전통적인 방식으로 지어진다. 이러한 기술은 부탄의 장인들 사이에 수세대에 걸쳐 전승되어 왔으며, 2004년 유네스코(UNESCO)는 종 건축기법을 ‘보호해야 할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특히 흙벽돌(람다, rammed earth)과 지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돌과 나무를 주로 사용하는 점이 두드러진다. 이런 재료는 고산지대의 극심한 일교차에도 강한 내구성을 보여주며, 단열과 환기 성능에서도 뛰어나다. 더불어 종의 벽체는 외부에서 공격이 어려운 경사 형태로 지어져, 방어 기능을 강화하고 있다.

 

이러한 건축적 특성은 지속가능성과도 맞닿아 있다. 종은 자연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재를 채취하며, 건축 과정 역시 환경을 해치지 않도록 설계된다. 이에 대해 부탄 왕립대학(Royal University of Bhutan)의 환경건축학 연구팀은 논문 「Sustainable Practices in Bhutanese Architecture」(2019)에서 종 건축이 “전통 생태건축의 모범 사례”라고 평가하고 있다.

공동체 정신과 상징적 의미

종은 단지 종교적·행정적 기능만 수행하는 공간이 아니다. 이는 공동체의 구심점이자 문화적 정체성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부탄에서는 마을마다 종이 있으며, 이곳은 마을의 의례, 축제, 집회가 열리는 중심지가 된다. 주민들은 종을 단순한 기관이 아닌 ‘정신적 고향’으로 여기며, 종 주변에서 결혼식이나 명절 행사가 치러진다.

 

종은 또한 부탄 건국 신화와도 깊은 연관을 갖는다. 17세기 샵드룽이 처음 종을 세웠을 때, 그는 “국토를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정신적 상징이 필요하다”고 말했으며, 이후 각 지역에 종이 세워짐으로써 부탄은 지역적 분열을 극복하고 하나의 국가로서 결속되었다. 영국 문화지리학자 데이비드 벨(David Bell)은 그의 저서 『Myth and Monument in Bhutan』에서 종을 “국가 정체성과 영적 결속을 아우르는 살아 있는 기념비”라고 표현했다.

 

종의 탑이나 벽면에 새겨진 문양들 또한 공동체의 정신세계를 반영한다. 예를 들어, 용 문양은 보호와 수호를, 구름 문양은 불변의 진리를 상징하며, 이는 티베트 불교의 철학이 시각적으로 구현된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의 종의 변화와 보존 노력

오늘날 부탄은 점점 더 현대화되어가고 있지만, 종은 여전히 사회 중심의 위치를 유지하고 있다. 최근에는 종 주변에 행정 청사나 현대적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원형이 일부 훼손되거나 변형되는 사례도 있지만, 부탄 정부는 이를 방지하기 위한 보존 정책을 적극 시행 중이다. 부탄 문화유산청은 2015년부터 전국 종에 대한 정기적 보수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전통 건축 양식에 따라 원형 복원을 원칙으로 한다.

 

또한 부탄 정부는 2008년 제정된 「전통건축보호법」(Bhutan Traditional Architecture Act)을 통해 종 건축에 사용되는 재료, 기법, 문양의 고유성을 반드시 보존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해당 법령에 따르면 종의 수리에 참여하는 장인들도 전통 수공기술 인증을 받아야 하며, 무단 증축이나 현대적 자재의 사용은 금지된다.

 

한편, 종의 현대적 활용도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예를 들어, 푸나카 종(Punakha Dzong)은 최근 전통 혼례식 장소로 각광받으며 관광 자원으로서의 가치도 함께 부각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전통의 보존과 현대적 기능의 조화를 보여주는 긍정적인 사례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