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은 안전하고 안정적인 거주를 전제로 설계된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그 반대 방향으로 전개되곤 한다. 기후 변화, 지진, 전쟁, 테러와 같은 위협은 불시에 공간을 붕괴시키고, 거주자의 삶을 뿌리째 흔들어놓는다. 이러한 위기의 시대에, 건축은 단지 아름다움이나 기능성만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 그 자체'를 설계의 일부로 수용하는 새로운 접근이 요구된다. 이 글에서는 파괴를 전제로 한 건축물 설계 이론이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고, 어떤 방식으로 실현되고 있으며, 건축학과 도시계획의 영역에서 어떤 철학적 전환을 불러오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불확실성의 시대, 건축은 무엇을 전제로 해야 하는가?
전통적으로 건축은 '오래 남을 것'을 염두에 두고 설계되었다. 유럽의 대성당, 아시아의 고궁, 근대의 콘크리트 타워들 모두 시간의 흐름을 견디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속성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오늘날 세계는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도시를 통과하는 태풍의 규모는 매년 커지고, 예상치 못한 전쟁이나 테러는 평화로운 거리마저 전장으로 바꾸어놓는다. 이처럼 불확실성이 일상이 된 세계에서, 건축이 지향해야 할 방향은 더 이상 '불멸성'이 아니다. 오히려, 파괴 가능성을 내포한 상태에서도 어떻게 사람을 보호하고 기능을 유지할 수 있을지를 중심에 두는 접근이 필요하다. 건축은 영원성을 포기하는 대신, 변화와 위기를 설계에 통합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론의 기원: 군사적 전략과 기술적 패러다임의 결합
파괴를 전제로 한 건축 설계는 결코 현대의 발명품이 아니다. 이 이론은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기를 배경으로, 핵전쟁 가능성을 고려한 군사 전략의 일환으로 등장하였다. 특히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은 핵 공격을 대비한 지하 벙커, 내진형 정부 청사, 군사 지휘 센터 등을 집중적으로 건설하였고, 이들 대부분은 파괴를 전제로 구조화되었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구조물의 견고함만이 아니라, 통신망과 전력 시스템의 이중화, 식량 저장 및 자급자족이 가능한 내부 시스템 등 ‘전체적 생존 체계’로서 건축이 재해석되었다는 점이다. 이후 이 이론은 점차 시민사회 영역으로 확산되었으며, 현재는 재난관리, 인프라 설계, 도시 복원력 연구의 기초 이론으로 자리잡았다.
복원력이라는 개념의 건축학적 재해석
‘복원력(Resilience)’은 원래 생태학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어떤 시스템이 외부의 충격을 받더라도 본래의 기능을 되찾는 능력을 의미한다. 건축학에서는 이 개념을 수용하여, 건축물이 외부 충격을 받았을 때 완전히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일정 부분 기능을 유지하거나, 신속히 복원될 수 있도록 설계하는 방식으로 발전시켰다. 복원력 기반 건축 설계는 기존의 방어적 건축에서 한 단계 진화한 형태로, 구조적 중복성, 에너지 자급성, 유연한 공간 활용성 등을 중시한다. 이는 단순한 ‘튼튼한 건물’을 넘어, '회복 가능한 환경'이라는 확장된 개념으로 접근하게 한다.
실제 사례를 통해 보는 파괴 전제 설계의 구현 방식
이론이 현실로 구현된 사례를 살펴보면, 파괴 전제 설계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설계 전략임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는 미국 국방부 청사인 ‘펜타곤’이다. 9.11 테러 당시 항공기 충돌로 인해 건물 일부가 붕괴되었지만, 링 형태의 구조가 내부 기능의 전면 붕괴를 막아냈다. 이 설계는 군사 시설이 갖춰야 할 생존성과 기능 분산의 원리를 잘 보여주는 예시이다. 일본의 건축가 구마 겐고는 목재 조립 구조를 활용해, 지진 이후에도 건물 재구성이 용이한 디자인을 제시하였다. 이는 파괴 이후 재생을 염두에 둔 건축의 대표적 사례이다. 또 MIT와 UNHCR이 협력해 만든 임시주거 모듈은 파괴와 철거, 이송, 재조립을 모두 고려한 설계로, 극단적인 환경에서도 사람의 기본 권리를 보호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도시 단위로 확장되는 파괴 전제적 사고
건축물 단위의 설계에 머물지 않고, 도시 전체가 파괴 이후를 고려한 구조로 재편되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이는 ‘회복탄력성 도시(Resilient Cities)’ 개념으로 정리된다. 도시계획자들은 홍수, 대규모 정전, 전염병 등 복합적 재난 상황에 대비하여, 지역 단위의 에너지 분산 시스템, 지하 피난 인프라, 응급용 자원 저장소를 도시 설계에 통합하고 있다. 뉴욕은 허리케인 샌디 이후 ‘Rebuild by Design’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도시 해안가에 복합 기능 방재 시설을 조성하였으며, 네덜란드는 ‘강을 위한 공간(Room for the River)’ 정책을 통해 일부 지역을 의도적으로 수몰지역으로 계획하여 자연과 도시의 공존을 설계에 반영하고 있다.
기술과 재료의 진보: 파괴를 고려한 설계의 기반
기술과 재료의 발전은 파괴 전제 설계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기존의 콘크리트나 철강 기반 구조체는 높은 강도를 지녔지만, 파괴 이후에는 복구가 어렵다는 한계를 지녔다. 이에 따라, 최근에는 자가 복원 기능을 갖춘 콘크리트, 에너지 충격을 흡수하는 폴리머 구조체, 분해 및 재조립이 가능한 모듈형 부재 등이 주목받고 있다. 또한, 3D 프린팅 기술을 활용한 건축은 파괴 이후 짧은 시간 내에 구조를 복원하거나 재시공하는 데에 매우 유용하며, 재난 지역의 임시건축이나 군사 기지, 원격지 개발에 점점 널리 적용되고 있다. 기술의 진보는 이제 건축을 단단하게 만드는 데서 그치지 않고, ‘유연하고 회복 가능한 구조’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열고 있다.
전략시설과 군사 인프라에서의 전통적 구현
군사적 목적의 시설들은 오랫동안 파괴를 고려한 구조로 설계되어 왔다. 예를 들어, 미국 콜로라도주에 위치한 체이엔 마운틴 벙커는 핵전쟁 상황에서도 명령 체계를 유지하기 위한 시설로, 두꺼운 암반층에 건설되어 강력한 핵 충격에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벙커 내부에는 독립된 전력, 수자원, 통신체계가 마련되어 있어 외부와 단절된 상황에서도 일정 기간 생존이 가능하다. 이러한 설계는 단순히 물리적 방어가 아닌, 사회 체계와 권력 유지의 연속성을 고려한 결과다. 그러나 이러한 시설의 문제점은 높은 구축 비용, 민간 전환의 어려움, 심리적 불안 유발 등의 사회적·윤리적 한계를 동반한다.
새로운 건축윤리의 탄생: 언제든 붕괴할 수 있는 세계에서
건축은 단지 공간을 짓는 기술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윤리적 프레임을 드러낸다. ‘파괴 가능성’을 설계에 포함시킨다는 것은, 이제 공간이 영구적이지 않으며, 우리가 사는 세계 또한 언제든 변형되거나 붕괴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다. 이는 생태학적 책임성과도 연결된다. 쉽게 지어지고, 쉽게 해체되며, 재활용 가능한 건축은 지속가능한 사회의 실현과도 맞닿아 있다. 파괴를 전제로 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의 유한성과 환경의 불확실성을 존중하는 철학적 전환을 의미한다.
실험과 실용의 경계를 넘나드는 현대 건축가들
오늘날 세계적인 건축가들은 파괴 전제 설계를 단지 위기 대응이 아닌, 건축의 새로운 창의적 기회로 받아들이고 있다. 렘 콜하스는 불확실성과 파괴를 도시의 본질로 이해하며, 유동적인 공간 개념을 적극 설계에 반영하고 있다. 알레한드로 아라베나는 칠레의 지진 이후 정부와 협력하여 저소득층을 위한 반가건축(half-house)을 제공했고,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거주자가 자력으로 확장 가능한 구조로 설계되었다. 이처럼 파괴 이후의 회복력까지 포함한 설계는 경제적 제약과 재난 위험이 공존하는 환경에서도 실용성과 창의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새로운 접근법이 되고 있다.
미래를 향한 제언: 기후 위기의 시대, 건축이 가야 할 길
앞으로의 건축은 단지 기능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생존과 회복을 위한 전략적 도구가 될 것이다. 해수면 상승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부유 건축물, 침수 대응형 기반 시설, 태양광 자급형 주거 등은 점점 보편화될 것이다. ‘계획된 붕괴’를 전제로 하는 건축은 더 이상 특수한 경우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도시와 구조물이 기본적으로 고려해야 할 설계 철학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건축가뿐만 아니라 정책 결정자, 시민사회, 기술자 모두가 ‘파괴 이후의 삶’을 진지하게 상상하고 준비해야 한다.
파괴 이후의 생존을 위한 새로운 설계 언어
건축은 인간의 존재 조건을 구체화하는 행위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설계하는 공간은 단순히 ‘사는 곳’을 넘어서, '살아남는 곳'이 되어야 한다. 파괴를 전제로 한 건축 설계는 기존의 미학적·기능적 패러다임을 뛰어넘어, 불확실성과 위기를 설계의 본질로 끌어들이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 언어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그리고 미래를 설계할 다음 세대에게, 깊은 책임과 상상력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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