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학에서 ‘모호성(ambiguity)’은 단순히 불분명하거나 불완전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경계를 허물며, 새로운 공간적 의미를 창출할 수 있는 잠재력을 내포한다. 이 개념은 기능, 형태, 의미의 일치가 전제되던 근대주의적 건축 담론을 넘어, 복합성과 다의성(multiplicity)을 수용하는 탈근대적 건축의 흐름 속에서 중요하게 부각된다. 모호성은 혼란이 아니라 의도적인 여백이며, 그것을 통해 건축은 단일한 해석이 아닌 다층적 경험의 장으로 확장된다.
기능과 형태 사이의 유동적 관계
건축에서 기능과 형태는 전통적으로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었지만, 모호성의 개입은 이 관계를 유연하게 만든다. 예컨대 하나의 공간이 주거로도, 작업 공간으로도 쓰일 수 있다면 그 공간은 기능적으로 모호한 것이다. 이는 공간의 활용도를 높이고, 사용자 중심의 해석과 재구성을 가능케 한다. 알도 반 아이크(Aldo van Eyck)의 암스테르담 놀이터는 이러한 개념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명확히 구분되지 않은 구조물들은 아이들에게 창의적 해석을 허용하며 놀이 방식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이처럼 건축의 기능과 형태가 고정되지 않고 유동적으로 상호작용할 때, 모호성은 창조성과 적응성을 동시에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경계의 흐림과 공간 경험의 다층성
건축에서 경계는 일반적으로 안과 밖, 사적과 공적, 자연과 인공 등을 나누는 요소로 작용한다. 그러나 모호성은 이러한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어 사용자의 인지적 경험에 영향을 준다. 일본의 건축가 이토 도요(伊東豊雄)는 자연과 건축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고, 이를 부드럽게 이어주는 공간을 통해 건축적 모호성을 구현한다. 예를 들어 투명한 파사드나 반투명 재료를 사용한 벽면은 안과 밖의 경계를 애매하게 만들어, 사용자가 공간을 경험하는 방식 자체를 변화시킨다. 이처럼 모호한 경계는 시각적 연속성을 통해 더 풍부하고 확장된 공간 경험을 제공한다.
상징과 의미의 다층적 해석 가능성
건축은 단지 물리적 구조물이 아니라, 문화적 상징성과 의미를 담는 매체이기도 하다. 모호성은 이러한 의미 해석의 다층성을 가능하게 한다. 예를 들어, 루이스 칸(Louis Kahn)의 설계작 중 하나인 소크 생물학 연구소는 그 자체로 고요한 명상적 분위기를 자아내지만, 동시에 과학적 실험의 공간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처럼 건축물이 상징하는 바가 명확하게 하나로 정의되지 않을 때, 사용자는 자신만의 해석을 덧입힐 수 있으며 이는 공간과의 관계를 더 깊이 있고 개인적인 차원으로 확장시킨다. 건축적 모호성은 의미의 독점이 아닌, 해석의 민주화를 가능하게 한다.
프로그램의 겹침과 시간적 유연성
하나의 건축물이 다양한 시간대와 용도에 따라 달리 기능할 수 있다면, 그 공간은 프로그램적으로 모호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도서관이 평소에는 독서 공간으로 사용되다가, 특정 시간에는 강연장이나 커뮤니티 모임의 장소로 바뀌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시간적 유연성은 공간 구성의 명확함보다는, 오히려 의도된 애매함과 중첩을 통해 달성된다. 렘 콜하스(Rem Koolhaas)는 이러한 다기능적 구조를 ‘프로그램의 충돌’이라 표현하며, 계획된 모호성을 통해 도시의 역동성과 유사한 성격을 실내 공간에서도 실현하고자 한다. 이는 단일 기능의 공간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고, 사용자 참여를 기반으로 한 실천적 다양성을 유도하는 방식이다.
시지각적 혼란과 건축적 긴장감
모호성은 시각적으로도 작동한다. 동일한 공간 내에서의 빛, 그림자, 반사, 투명성 등은 사용자에게 착시적 혹은 다층적 감각을 유발하며, 시지각적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불쾌함이 아닌 건축적 긴장감을 형성함으로써 공간에 대한 인식을 풍부하게 만든다. 현대 미술관이나 전시공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이러한 효과는 건축을 단순한 기능적 껍데기가 아닌, 감각적 상호작용의 장으로 바꾸어준다. 타다오 안도(Tadao Ando)의 작품처럼 콘크리트 벽면에 비친 자연광의 흐름은 고정되지 않는 시간성과 함께, 공간을 ‘느끼게’ 하는 경험으로 확장시킨다. 이처럼 모호성은 감각의 경계까지 포괄하며, 지각적 참여를 유도한다.
건축적 담론에서의 전략적 활용
건축 이론에서도 모호성은 하나의 전략으로 기능한다. 특정 건축 프로젝트가 정치적, 문화적, 혹은 사회적 맥락 안에서 갈등을 최소화하거나, 해석의 폭을 넓히고자 할 때 모호한 표현은 유용하게 작동한다. 예를 들어 공공건축물에서 정체성과 중립성을 동시에 요구받을 때, 모호성은 이러한 상충 요구를 조율할 수 있는 설계 전략이 된다. 애매한 형태, 추상화된 상징, 중립적인 재료 선택은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에게 각기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포용적인 건축 언어를 구성할 수 있게 한다. 이는 정치적 건축이 어떻게 상징성과 기능성 사이의 균형을 잡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도시 구조와 맥락에 따른 모호성의 재구성
건축적 모호성은 독립적인 개체로서의 건축물뿐만 아니라, 도시의 구조와 맥락에서도 작동한다. 도시재생 프로젝트에서는 과거의 흔적을 완전히 제거하기보다는, 일부를 남겨두고 새로운 구조와 혼합함으로써 시간성과 정체성의 모호한 층위를 만든다. 이러한 설계는 과거와 현재를 이분법적으로 나누기보다, 시간의 연속성 속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구성하는 방식이다. 베를린의 슈프레강 주변 재개발 구역이나 일본 가나자와 21세기 미술관처럼, 장소성과 비장소성이 동시에 작동할 수 있도록 의도된 모호한 공간 구성은 도시 내에서 건축의 의미를 더욱 복합적으로 만든다.
결론: 모호성은 혼란이 아닌 가능성의 확장이다
건축에서의 모호성은 계획의 결핍이나 설계의 실패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고정된 의미나 기능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사용자의 참여와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창조적 장치다. 모호성은 현대 건축이 복잡한 사회적 요구, 다원화된 문화,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선택한 전략이자 철학이다. 건축은 더 이상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지 않으며, 모호성을 통해 열려 있는 질문으로 존재한다. 그 질문은 건축을 경험하는 이들 각자의 삶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응답받게 될 것이다. 이처럼 모호성은 건축을 살아 숨 쉬는 담론의 장으로 만들며, 그 안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해석하고 다시 의미를 구성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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